▲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고공농성 첫날 저녁이 왔다. 밑에는 말벌동지들이 아직 있고, 저길 너머에는 고진수 동지가 있다. 구미에는 박정혜, 소현숙이 있다. 썩을 세상!”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15일 저녁 8시15분께 서울 중구 한화본사 앞 CCTV 철탑에서 소셜서비스 X(옛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고진수 동지는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 박정혜·소현숙은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수석부지회장과 조직2부장으로 해고노동자다. 고 지부장은 16일 기준 2월13일부터 31일째, 박정혜 수석과 소현숙 2부장은 434일째 고공농성 중이다. 노동자 각각 다른 업종과 다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4명이 각각 다른 고용불안을 이유로 동시에 하늘에 머문 밤이다.

파업 123일째, 2022년과 꼭 같은 싸움

새내기 고공농성자인 김 지회장은 지난해 4월 시작한 2024년 임금·단체교섭 마무리와 상여금 인상을 촉구하며 15일 철탑에 올랐다. 1년 가까이 교섭했지만 타결은 요원하다. 핵심 요구는 상여금이다. 2016년 조선업 불황으로 대대적인 원·하청 구조조정이 발생한 당시 일괄 삭감된 상여금 550%를 복원하라는 구호를 큰 틀로, 지난해 교섭에서는 300% 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요구치는 점점 작아졌다. 노조에 따르면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의 최근 마지막 제시는 상여금 50% 초과다. 2023년 50%로 합의한 뒤 이를 조금이라도 넘기는 ‘성의’라도 보이란 의미다.

그마저도 외면받고 있다. 주요 교섭 상대인 한화오션 사내협력사는 개별 교섭을 고수하다 올해 들어 가까스로 19곳 업체가 참여한 집단교섭에 응했지만 별다른 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버텼다. 하청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2010년 대법원 판례에도, 한화오션은 직접 근로관계를 맺지 않았다며 마찬가지로 버텼다. 3월 들어 교섭은 열리지 않았다. 이김춘택 지회 사무장은 <매일노동뉴스>와 통화에서 “수위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김 지회장 고공농성은 이제 이틀째지만 지회가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시작한 농성은 지난해 11월13일부터 벌써 123일째다. 초기에는 천막도 설치하지 못해 풍찬노숙했다. 김 지회장은 거제와 서울을 오가며 상황을 알리다 12월3일 밤을 국회 앞에서 맞는 기막힌 우연도 겪었다.

이번 고공농성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앗아갈 전망이다. 김 지회장은 이미 2022년 6~7월 51일간 파업농성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형사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김 지회장은 철탑에 오르기 전 언론에 배포한 글에서 “470억원 손해배상 소송에 2022년 파업투쟁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 이런 선택을 한 것은 더 물러설 수 없다는 결의”라고 썼다.

대법원 “심리불속행”에 멍든 몸과 마음

김 지회장과 달리, 지난달 13일 세종호텔 인근 지하차도 진입 차단 시설에 오른 고 지부장은 다툴 법정도 없다. 그는 코로나19가 창궐했던 2021년 12월 경영난을 빌미로 해고됐다.

고 지부장을 비롯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는 무던히도 거리를 누볐다. 2021년 그해 겨울부터 걸었다. 2022년에는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에 대한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결정을 앞두고 도보행진을 했다. 그러나 서울지노위와 중앙노동위원회, 그리고 뒤이은 1·2심은 잇따라 해고를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래서 2023년 9월에는 2박3일간 오체투지를 했다. 몸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불교의 예법인 오체투지는 어느새 절박한 이의 호소를 대변하는 수단이 됐다. 지난해 10월에는 두 번째 도보행진에 나섰다. 그렇지만 대법원은 끝내 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더 들여다볼 것도 없다며 심리불속행 기각했다. 법적 해결이 모조리 무산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하늘에 오르는 것이었다.

고 지부장 등 세종호텔지부는 세종호텔의 코로나19 정리해고는 그 이전부터 지속한 노조탄압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지부는 2021년 코로나19 확산 당시 사용자가 정부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면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10% 금액은 노조가 책임지겠다는 자구책까지 냈다. 그럼에도 사용자쪽은 고 지부장 등 12명을 정리해고했고, 이에 반발한 노조가 파업하자 직장을 폐쇄했다. 2023년 세종호텔은 흑자로 전환했지만 해고노동자 복직은 없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철거 막으러 오른 공장옥상에서 1년3개월
“노동자 문제 풀어낼 시스템 작동 안 해 극단 투쟁”

박정혜 수석과 소현숙 부장이 지난해 1월8일 불탄 공장에 오른 것은 당시 구미시가 공장 철거를 조건부승인했기 때문이다. 2023년부터 이미 공장을 철거하겠다며 중장비를 앞세워 진입을 시도하거나, 조합원을 위협하던 사용자쪽이 행정청 승인을 얻어 실제 철거에 나설 수 있다고 보고 그날 새벽 긴급히 땅을 버렸다. 그게 434일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고공농성이란 방식에 종종 가려진 또 다른 사실은 이들이 불탄 공장부지에서 농성을 시작한 것이 이날로 777일째라는 점이다. 2022년 10월4일 오후 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화재가 나 공장이 전소하자 사용자쪽은 노동자들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반복하다 같은해 11월4일, 화재로부터 꼭 한 달 만에 청산을 발표하고 노동자 193명을 희망퇴직시켰다. 이를 거부한 노동자를 해고했다. 777일간 이어지는 해고투쟁의 서막이다. 당시 막 지회장이 됐던 최현환 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장은 일본 원정을 능숙하게 다니는 베테랑이 됐고, 농성을 하며 노조를 배우던 박 수석과 소 부장은 최장기간 고공농성을 한 여성노동자로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한국옵티칼은 일본 니토덴코 그룹의 국내 LCD 편광필름 생산 자회사다. 50년 토지 무상임대 등 각종 혜택을 받고 2003년 공장을 차려 2004~2021년 18년간 7조7천102억원 매출을 올렸다. 니토덴코가 배당금으로 가져간 돈만 1천734억원이다. 여기에 한국옵티칼이 니토덴코로부터 원재료를 매입하면서 지불한 금액 5조9천279억원과 로열티 등을 종합하면 약 6조3천354억원이 니토덴코로 넘어갔다.

화재 이후에도 물량을 국내 또 다른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으로 옮겨 화재로 니토덴코가 입은 손실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투쟁이 장기화하고 고공농성이나 단식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노조와 노동자의 문제제기를 풀어낼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김 상임활동가는 “헌법이 실정법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목적이 있는 것인데, 이런 취지가 작동하지 않고 오래된 제도가 현실을 담지 못해 투쟁이 장기화하고 답을 찾지 못해 극단화하는 비극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료사진 이재 기자
▲ 자료사진 이재 기자